내가 기억하는 소설의 첫 문장들

 엘레아학파가 운동을 부정하였을 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반대론자로서 디오게네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실제로 걸어 나왔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몇 번 앞뒤로 걸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써 그는 그들을 충분히 반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반복 - 실험적 심리학의 시도」(임춘갑 옮김)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연인』(김인환 옮김)

 수녀들은 욕정처럼 소리 없이 지나가고, 술 취한 남자들과 술 취하지 않은 눈들이 그리크 호텔의 로비에서 노래를 부른다. 
- 토니 모리슨,『가장 푸른 눈』 (신진범 옮김)

by 아니마 | 2011/12/31 23:59 | 이삭줍기 on/offline | 트랙백(1) | 덧글(3)

잘나가는 그 남자, 조세 무링요의 '휘브리스'

기사 원 출처: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신께서는 내가 정말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분명하다. 진짜로.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이렇게 많은 걸 주셨겠나.
난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갖고 있고 내가 언제나 꿈꾸던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신께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가 나에 대해 정말 좋게 생각하는 것 같다."

 희랍신화를 모태로 한 서사시와 비극에는 승승장구하던 중 신에 대해 경솔하게 말하고(오만hybris) 씁쓸한 파멸을 겪는 신들의 자식들, 영웅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고대인들 중 경건했던 몇몇 사람들은 왕후장상들이 겪은 비참한 말로의 원인을 자신이 신과 맞먹는다 생각한 그들의 과거 행적에서 찾았다.  다른 남유럽 사람들처럼 카톨릭 신자인 무링요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하는 이 발언이 어떻게 오만으로 읽힐 수 있느냐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 40대 중반에 이른 이 축구감독의 '성공'만으로 점철된 프로 경력은 방관자로 하여금 그의 발언을 불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구석이 있다(하위권 클럽을 전전하는 2류 감독이 같은 말을 했더라면 이 말을 이루는 안팎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으리라). 과연 무링요의 '신'은 그를 위해 어떤 운명을 정했을는지?   

by 아니마 | 2011/02/20 00:24 | 세리에A축구 관련 번역 | 트랙백 | 덧글(5)

verba defectiva & redupication

베르바 데펙티바(결여된 단어):
 - 흔히는 (직설법) 현재 시제의 활용법이 상실되어 과거완료(perfect)시제가 현재시제를 대신해 쓰이는 일부 동사군을 지칭.
  당장 떠오르는 동사로는 실제로 memini란 과거완료형으로 쓰이는 miniscor가 있다.
  뜻은 '기억하다, 회상하다'; 뜻 자체가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reminiscent'같은 영단어에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는 이 동사의 기묘한 실존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음절의 반복(reduplication):
 - 동사의 시제가 바뀌면서 첫 음절의 앞 자음이 다른 모음과 결합해 어두에서 반복되는 현상.
   miniscor가 memini가 되는 변화에서 mi앞에 붙은 me가 반복된 음절이다.
   실제 삶에서의 반복이 그렇듯 여기서도 '차이'를 통해 중복이 아닌 진정한 반복이 실현되고 있다.
 

 라틴어와 희랍어라는, '사유'가 필요없는 영역에선 볼 일이 없는 옛말을 배우면서
그에 관해 아무 것도 끄적이지 않으면 섭섭할 것 같아 새로운 태그 하나를 시작해본다.

...라지만,사실 틈만 나면 그리스, 로마 역사서 끄집어서 들이대는 서양 글쟁이들 흉내 좀 내보고 싶어서. 흑흑..

by 아니마 | 2010/12/16 01:02 | 내가 쌓는 바벨탑 | 트랙백 | 덧글(0)

모래고양이.

이미지 출처: exoticcatz 

 미국 사람들은 자연생태계와의 교감 유지라는 '우아한' 주제에 골몰할 여유가 많아서인지, 야생종 고양이(푸마나 표범처럼 큰 아이들도 포함)의 반려동물화라는 매우 대담한 시도를 떳떳하게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 듯 하다. 기존에 이미 오시캣, 쇼지, 사바나처럼 야생종과의 교배로 탄생한 와일드한 외모와 상냥한 성격(-_-;)의 괭이 품종이 있음에도, 스라소니나 세르발, 오셀롯처럼 야생에서 위기에 처한 종들의 어린 아가들이 인터넷 장터에 매물로 나와 있는 걸 많이 보았다(내가 좋아하는 카라칼은 시장에선 아직 인기가 덜한 것 같던데 다행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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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성을 희생해서 한 동물 종을 산 채로 보존하는 게 어차피 전세계 수많은 동물원들이 하는 일이라면, 그 동물원들이 '사적'으로 좀 많아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 같다. 그런데 이 발상이 포유류를 넘어 인간과 비교적 덜 친숙한 다른 종들에게도 확산된다면? 사막화된 세계에서 인간들의 거주지 안에 좁디좁은 식민지를 얻어 사는 동물들을 생각해 본다. 고양이과만 한정해서 보면,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 100% 길드는 일은 없다는 데 위안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진의 모래고양이는 페넥여우와 비슷한 사막동네에 사는 모양인지 얼굴이 펑퍼짐한게 닮았다. 사진 속 녀석은 전혀 웃기려는 의도가 없는 것 같은데 볼 때마다 피식피식.

by 아니마 | 2010/11/22 00:30 | 이삭줍기 on/offline | 트랙백 | 덧글(0)

'엘 시크레토(-_-) - 비밀의 눈동자': 회상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이미지 출처: il Cinemaniaco
나처럼 못나서인지 공감 철철에 마지막엔 동정심까지 품게 만든 페드로 산도발이 주인공 뒤에 나와서 좋다.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감상법이기도 하거니와, 요 몇달간 영화 보러 극장을 열심히 찾아다니질 않았더니 영화관에 갈 때마다 처음 보는 영화에 부당한 기대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괜찮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뭐야 그냥 보다 보면 전체 줄거리 다 이해되는 영화였어?'하고 싱거워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_- (요새 시점이나 관점 꼬아서 만든 영화들이 워낙 많아서 그랬나...)
 유럽의 유명한 영화제들에서 큰 상 좀 탔다는, 회화적인 구도와 시적인 분위기의 포스터만 봐도 거장의 난해한 손길이 역력한 아주 내면적인 영화들(흡사 감독이 스스로를 치유하러 만든 듯한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답답하고 비상식적인 전개에 당황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영화가 매우 고플 때 꼭 그런 영화들이 땡기고 그들이 미묘하게 건네는 공감의 손길을 기대하게 되는 건 무슨 이율까? 교양 좀 있다는 사람들이 뭔 소린지 모르겠단 말을 수없이 되뇌면서도 철학서를 집어드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까?

 기억이나 회상, 과거가 현재의 인간에게 '청구서'를 들이미는 방식에 흥미를 갖는 나로선(현실에서든 영화 보면서든...) 이레네가 소설을 쓰기 위해 25년 전의 사건을 더듬는 에스포지토에게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한 대사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 영화의 에스포지토와 모랄레스처럼 평생을 과거와 기억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인간뿐인가, 심지어 국가들도 그렇다)들이 허다한데, 자기처럼 앞만 보고 사는 사람들에겐 뒤를 돌아보는 일조차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나.

 이미지 출처: wuz.it
솔레다드 비야밀Soledad Villamil이 분한 이레네 헤이스팅스. 스페인어로 '솔레다드'는 '고독'이란 뜻이다.
알모도바르의 '귀향(Volver)'에 나오는 이발사 둘째 딸의 배역 이름도 솔레다드였다. 왜 아이에게 고독이란 이름을 붙일까?;;

 며칠 전 공원에서 운동을 하다가 '남들 평판에 신경 많이 쓰고, 남들 다 사는 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폐쇄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관이 뚜렷하고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자기 틀 안에서 이 세계와 무수한 인간들의 개성을 담아내는 데 '그 나름대로' 성공했기에 그러는지도 모르지만, 줏대 없는 사람들은 남의 의견 또는 방식을 추종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그 의견을 낸 남들을 자기 세계에서 몰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모양을 한 퍼즐조각들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남들같은 나'안에 어떻게 남을 수용할 여유가 있겠는가? 이 뜬금없는 가설에 비추어서 따져 보면 지나치리만큼 상식적이어서 "과거를 돌아볼 능력이 없는" 이레네는 과거에 대해 닫혀 있는 불완전한 인간인 셈이다. 딱한 점은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 이레네와 같거나 이레네를 동경하고 있다는 거겠지. 물론 이 영화 속 이레네도 완전히 '반듯'한 인간은 아니라, 자기만의 극복하지 못한 과거에 회한도 갖고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역시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래도 감독은 연약한 대중들을 최대한 배려해서 긍정적인 메시지만 남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충격과 공포의 엔딩을 선사할(여기에 쓰면 스포다) 주인공의 관찰대상자 모랄레스는 과거에 대해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시라"고 충고한다. 그래, 좋은 것만 남겨야지. 친절, 미소, 얼굴에서 나오던 밝은 빛, 천진함, 풍경의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마지막으로, 제목에 찌푸린 얼굴(-_-)이 추가된 이유. 왜 요즘 개봉하는 외화들의 한국어 제목은 하나같이 어딘가 어설픈가?
원제가 'El Secreto de sus Ojos' - 대학 첫학기에 맛만 본 스페인어 실력이지만 '그의 눈들의 비밀'이란 뜻 같은데, 이걸 '비밀의 눈동자'라고 어순을 바꾼 건 한국어로 더 감이 오는 제목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줄 수 있다. 근데 그 앞에 굳이 '엘 시크레토'를 붙인 이유는 간지나는 제 2외국어의 도움 없이 그럴듯한 제목을 못 뽑겠다는 뜻 아닌가? 그나마도 왜 '세크레토'가 아니고 '시크레토'라고 영어 흉내를 내는가?(스페인어의 e발음에 우리말 '이'에 해당하는 음가가 없음이 분명한데도...) 
'Backdraft'를 '분노의 역류'로 바꿔 줄 정도의 고심한 흔적이 나는 제목을 요새 한국 극장 포스터에서 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머니 네버 슬립스' 정도가 아니면 다행이라 해야 할 판이다). 하긴, 그 옛날에도 괜찮은 제목 뽑기 위해 외화 수입업자들이 헐리웃 영화들의 일본 개봉명을 흘끔거렸다는데 여러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자신의 창의력의 70%가량은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진짜 마지막,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했을 수도 있습니다 -ㅂ-

by 아니마 | 2010/11/14 23:32 | 영화,혹은 가상의 추억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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